[새 정부 출범 한달, 전문가들 고언은…] 정확한 정보 제공·공론화·사회적 합의 강조

[이투뉴스] 지난 8일 오전 서울 종로구 세종문화회관 앞. 탈원전을 지지하는 80여개 시민사회단체의 모임인 ‘핵없는 사회를 위한 공동행동’ 활동가들이 일제히 “2017년을 탈핵원년으로”라고 쓰인 노란색 현수막을 펼쳐 들어보였다. 사실상 인수위 역할을 맡은 국정기획자문위원회의 ‘국정운영 100대 과제’ 확정을 앞두고 문재인 대통령의 탈핵 에너지공약 이행을 촉구하는 기자회견 자리다. 공동행동 측은 회견에서 신고리 5,6호기 건설 중단 및 백지화, 탈핵로드맵 수립 등 공약을 열거하면서 “대통령의 탈핵 약속은 안전하고 지속가능한 에너지를 염원하는 모든 국민들과의 약속이자 이 땅에 태어나고 살아갈 후손들을 위한 약속이다. (공약은) 반드시 지켜져야 한다”고 역설했다.

같은 시각 서울 관악구 서울대 38동 시진핑홀. 원자력학회와 원자력산업회의 등 원전 산·학 단체가 공동주최한 '고리1호기 퇴역기념' 심포지엄에 200여명이 몰렸다. 이달 18일 국내 첫 원전 영구정지를 앞두고 원자력 산업 공과를 짚어보자는 취지로 열린 행사였으나 내용은 산업계 진영에서 바라본 새 정부 탈원전 공약의 부당성 성토가 주류를 이뤘다. 심포지엄에서 이종훈 전 한전사장은 “지금 풍미하는 반핵 분위기 때문에 차세대 원자력기술이 사장되면 영영 기술 낙오국으로 전락해 후손들에게 부끄러운 세대로 평가될 것”이라고 했고, 노동석 에너지경제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탈핵시나리오가 추진될 경우 원전 대체발전에 가스 14조원, 신재생 43조원의 추가부담이 발생, 전기요금이 79.1% 인상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달 9일로 출범 한 달을 넘긴 문재인 정부의 에너지정책이 조만간 외양을 드러내 본격적으로 시험대에 오를 것으로 보인다. 주무부처인 산업통상자원부 장·차관 인선 등 내각구성은 아직 완료되지 않았으나 일찍이 관련 공약과 노후화력 한시 가동중단 업무지시 등을 통해 새 정부의 방향성을 분명히 제시한 만큼, 이제는 정책 이행성을 높기기 위한 디테일 전략을 수립·제시해야 한다는 여론이 비등하다. 이와 관련 전문가들은 새 정부가 과거 정책의 타성과 관성에 함몰되지 않도록 ‘경로의존성(path dependency)’ 타개에 주력하되 사회적 합의와 입체적 접근을 통한 정책 실효성 확보를 주문했다.

우선 최기련 아주대 명예교수는 이해집단들이 앞장세운 전문가층을 물리치고 객관적 입장에서 기술혁신을 파악해 정확한 팩트를 국민에게 제시하는 일이 정책 성공의 첫 단추가 될 것이라고 조언했다. “기술혁신의 트렌드를 파악하지 못하는 비전문가가 전문가인 척 하는 게 현재 혼란의 원천”이라는 것. 최 교수는 “최근 충돌하는 원자력계나 신재생업계 모두 이해집단화 돼 있다. 정부가 특정 이해집단이나 폴리페서들의 의견만 받으니 미세먼지 대책과 같은 혼란을 야기하는 것”이라며 “정부의 역할은 규제를 세계적 기술흐름에 맞추고, 규제 주체의 중립성을 확보하는 일이 핵심”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기존 원자력의 경우 어차피 전세계적으로 사양산업화 되고 있어 정부가 걱정 안해도 된다. 노후 산업기술은 자연스럽게 퇴출되도록 하고 신재생은 우선 국민부담을 정확히 알려 사회적 합의를 얻어내도록 해야 한다”고 부연했다.

에너지정책의 가장 큰 문제는 외부환경이 급변했음에도 관성 탓에 변화를 거부하는 ‘경로의존성’이므로 이를 타개하는데 정책 역량을 결집해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에너지컨설팅기업 한 CEO는 “전 세계 에너지패권이 판이하게 달라졌는데, 우리는 1970년대 오일쇼크 때 가격체계와 제도, 수급시스템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달리 말하면 아무것도 모른다는 얘기”라면서 “글로벌 에너지시장이 어떻게 급변하고 있는지 파악해 유연하게 대응해야 하지만, 현재는 안정적 수급에만 치중해 공공중심으로 과도하게 비탄력적이고 비효율적으로 운영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 CEO는 “이런 틀 안에서 수십년을 보낸 조직이 어디 나가서 경쟁력을 발휘할 수 있겠냐. 에너지를 세원이나 민생으로만 보는 재정당국과, 눈치만 빠른 젊은 산업부 과장들이 에너지를 칸막이로 만들어 좌지우지하는 게 대한민국 에너지정책의 수준”이라고 일갈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도 기존의 틀을 깨려는 문제인식이 부족하고 관료위주로 정책기조를 수립하는 듯 보인다. 과거 정부도 요지부동의 관료중심 체제운용에서 난맥상이 발생했음을 기억해야한다”면서 “경로의존성에 매몰된 나라를 변혁시킬 수 있는 것은 이 의존성의 큰 흐름의 맥을 찾고, 그걸 어떻게 다스려야 할지 깊이 분석하고 고찰하는 일”이라고 역설했다. 에너지전환을 놓고 최근 격화되는 비용논란에 대해서는 국민이 판단할 수 있는 객관적 사실을 알린 뒤 사회적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이 필요하다는 조언이 재차 나왔다. 또 일각의 비용추산은 과도하게 부풀려졌을 가능성이 높다고 진단했다.

전력당국의 한 관계자는 “원전과 석탄화력을 줄이면 엄청난 비용이 발생할 것처럼 얘기하지만, 실은 그런 현상이 상당히 오랜기간 점진적으로 일어나 연간 기준으로보면 그리 큰 부담이 아닐 수 있다”면서 “독일의 경우 전기료가 상승한 건 사실이지만 단계적으로 요금을 현실화 했고, 소비자들도 충분히 감내 가능한 수준이라는 확신과 에너지전환에 대한 굉장한 자부심을 갖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원자력의 경우도 사업자가 모든 리스크를 안는 미국이나 유럽은 경제성이 없어서 못하는 것이고, 우리는 국가가 모든 부담을 대신 떠안는 구조라 저렴하다는 것인데 이런 정보에 대해 국민이 정확한 정보를 얻지 못하고 있다”며 “8차 전력수급계획에서는 이런 부분들을 충분히 공론화 해 분명한 시그널을 주고 연착륙 방안이나 속도에 대해서도 충분히 논의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같은 맥락에서 에너지전환 비용을 단기 한계가격이 아닌 장기 한계가격으로 도출하고, 이 과정에 각 분야 전문가의 중지를 모아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또다른 전력기관 시장전문가는 “단순히 비용이 얼마가 필요하다는 식의 접근은 함정이 있다. 전원믹스를 바꾼다는 것은 가스직도입가격, 개별소비세 과세 문제, 탄소세 및 배출권 문제, 원전의 사회적 비용 문제 등을 모두 감안해 전원계획 차원에서 장기 한계가격을 따져봐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접근하면 외부비용 반영 수준에 따라 오히려 전체 비용이 감소할 수도 있다”면서 “달랑 연료가격으로 비용을 따져보는건 무의미하다. 개인적 판단분석이 아닌 각계가 참여하는 전문가 태스크포스팀을 만들어 공약 이행 수준에 따른 연착륙 방안과 분석을 통한 교통정리가 절실히 필요하다”고 힘주어 말했다.

파격적 방향 설정을 뒷받침할 현실적 대안을 고민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있다. 손양훈 인천대 경제학부 교수는 "가치로서 깨끗하고 안전한 에너지 수급은 누구나 원하는 바이지만 문제는 어느 정도로 거기에 빨리 다가가야 하느냐, 그렇게 가려면 어떤 위험을 무릅써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국민적 동의와 이해가 필요하다"면서 "현재의 공약은 일단 파격적이다. 현실화를 위해 어떻게 대안을 만들것인지, 어떻게 비용을 부담할 것인지에 대해 대책을 세우고 설득해야 한다. 물론 그런 시도는 이전 정부에도 있어왔으나 생각보다 쉽지 않다. 굉장히 힘든 작업이 남아있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상복 기자 lsb@e2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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